Chung Seoyoung : What I Saw Today: SeMA
《오늘 본 것》은 조각가 정서영(b. 1964)의 개인전으로, 1993년부터 제작, 발표한 주요 작품들과 신작 9점을 포함한 총 33점을 선보인다. 한국 현대미술이 다양성과 개별성을 획득한 시기로 일컬어지는 1990년대에 현대 조각의 동시대성을 견인한 작가로 평가되는 정서영은 현재까지 조각을 포함한 드로잉, 사운드, 영상,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와 영역에서 유연하게 조각의 문제를 다루는 예술적 실험을 지속해 오고 있다. 《오늘 본 것》은 작가가 매일 본 것 중 색상, 질감, 동세, 부분 등에서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인상적인 상태를 적어 두는 지난 몇 년의 습관을 전시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이처럼 《오늘 본 것》은 작가의 단상 노트 제목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본 것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물리적 경로이며 세상과 관계 맺는 장이라는 정서영의 조형인식을 나타낸다.
정서영은 조각을 고정된 물체 너머 유동적인 양상을 드러내는 일종의 관계적 ‘플랫폼’으로 생각한다. 하나의 ‘형(形)’으로 이뤄지기까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다양하고 복잡한 각각의 요소는 ”움직이고, 흐르고, 생겼다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요소는 스치는 생각이나 감정, 행위, 사물, 상황 등에서의 유무형적 편린으로서 ‘나-사물-세계’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에서 유동적이고 독립적으로 산재한다. ‘조각적 순간’은 이들 각각이 찰나적으로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관계를 맺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의미하며, 이때 조각은 발생하게 된다. 전시 초입에 배치된 작품 3점은 작가의 예술적 세계관과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초기작들로, <전망대>는 “사물에 대해 알려진 사실, 믿음에 대한 합의를 깨는” 작가의 태도가, <파도>는 동적 또는 무형의 것을 조형예술적으로 포섭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작가가 작품의 제목이나 텍스트 드로잉 형태로 사용하는 특유의 언어 또한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요소로서 각 요소 간 충돌, 갈등, 선택, 소멸의 과정을 거치며 그 맥락을 한층 다면화한다. <-어>에서는 망설임, 놀라움 등 여러 해석이 가능한 ‘어’라는 글자 하나를 그려 넣어 열린 가능성을 암시한다.
‘조각적 순간’의 발현을 기다리고 궁구하는 치밀하고 복잡다단한 과정과는 별개로, 작가의 조각은 일견 특별하지 않은 재료의 단순한 조합으로 보인다. 하지만, ”생각은 세밀하게, 그러나 보여 주기는 멍청하게“라는 그의 말처럼, 작가의 작품에서 그저 그렇게 보이는 간단하고 일상적인 요소들은 오히려 다층적인 의미 분화를 파생하고, 듬성듬성 발생하는 공백은 역설적으로 더 풍부한 함의의 여지를 갖게 한다. 본 전시에서도 헝겊, 스펀지, 카펫, 플라스틱, 고무 등 일상적인 재료가 간결한 외형으로 공간의 여백과 어우러져, 작가 작업의 고유한 속성을 보여 준다. 지난 30여 년간 작가가 선택한 사물의 위상은 변화하였다. 일부 재료는 단종되기도 하였고, 빛, 소리, 문자 등은 새롭게 채택되어 조각 영역의 확장을 이루었다. 신작에서는 브론즈, 스테인리스 철사 등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하는데, 이는 고전의 재해석이라는 측면에서 또 다른 확장이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작품들의 배치 방식이다. 대표작들이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자리하는데, 작품이 등장하면서 엮어지는 모든 연관성을 중시하는 작가의 특성상 작품 간, 작품과 그것이 놓인 위치 간 관계성이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형성되어 제시된다. 그중에서 중앙부에 위치한 신작 <뇌 속의 뼈>는 간결한 직선 형태의 브론즈가 이어지고 갈래 쳐 뻗어나는 형상으로 이번 전시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조각에서는 유동적 요소들이 일순간 일맥관통(一脈貫通)하여 뼈대와 같은 형을 갖추는 순간이 연상되며, 나아가 전시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느낌이 있어 정서영의 조각 세계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삶은 유튜브,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 잠식당하고 있다. 무엇을 보고 어떤 경험을 하는지는 순간적인 이미지나 영상 형태로 표현되고, 좋아요와 하트처럼 타인의 반응에 의해 행동과 심리가 좌우된다. 오늘날 예술 작품을 대하는 자세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주가 되어야 할 작품은 눈으로 직접 체감되기 보다 카메라의 일시적인 대상으로 전락하였고, 감상은 주변의 평에 지배된다. 정서영의 작품은 전술한 바와 같이 간략한 형태로 표현되어 함축적이고 직관적인데, 이는 이해에 있어 다소 불편함을 야기하여 글로 풀어쓴 설명에 의존하기 쉽다. 이에 대해 작가는 ”작품이 내포하는 복합성을 경험하는 통로가 하나가 아니”기에, ”작품의 의미를 바라는 것 자체가 장벽이 될 수 있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목격자인 자기 자신을 믿었으면 좋겠다“라고 한다. 전시 말미에 있는 <세계>는 유토로 캐스팅된 호두 조각을 둘러싼 빛, 사운드 등이 미세하게 변화하는 과정을 10여 분간 관찰하는 영상 작품으로 어떤 것을 오랜 시간 집중해서 보는 문제를 다룬다. 사실 ‘조각적 순간’은 순식간이지만, 그때를 포착하고 이해하기 위해 작가는 오랫동안 사물을 유심히 관찰한다. 이에 반해 우리가 작품과 소통하기 위해 들인 시간과 정성은 어느 정도일까? 전시 제목인 ‘오늘 본 것’은 다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오롯이 ‘작품을 보라’는 작가의 짧고 굵은 당부일지 모른다.
“사물을 조감도처럼 들여다보면 그 안에 설정된 관계, 유형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그것이 복잡해 보이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지 쳐지고 덧붙여진 의미들이 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작용들의 연결고리를 흐트러뜨리면 간단한 단위들이 나타나고, 그 단위들 중 일상적인 복합성을 포함하는 것들을 골라 또 다른 경험의 조건을 만들어 가는 것이 나의 조각이다.” - 정서영
서울시립미술관 이승아 큐레이터
-참고문헌
김정란, 「사물들과의 조금 까끌까끌한, 움직이는 관계: 조심스럽고 사랑스러운 불안」, 금호갤러리, 『정서영 개인전』 (금호갤러리, 1995).
김현진, 「스스로 빛나고 진동하는 사물과 언어」, 『아트인컬처』, 2008년 1월.
장지한, 『그것이 그곳에서 그때 - 김범과 정서영의 글과 드로잉』, 장지한 엮고 씀 (미디어버스, 2022).
정서영, 바라캇 컨템포러리와의 인터뷰, 바라캇 컨템포러리, 2020년 6월 10일.
정서영, 「사물에의 가담과 투사에 의한 조각 작품 제작 연구」, (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1989).
홍순명, 「철저함과 허술함의 공존」, 『월간미술』, 1999년 11월.
Ms.C, 「Ms. C의 정서영 인터뷰」,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 (현실문화,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