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men in Focus

Marie Claire Maison

뉴욕 첼시의 중심에서 지난 10년간 자리를 지켜온 티나 킴 갤러리는 이제 분명한 정체성을 지닌 이름으로 자리매김했다. 경매 하우스와 미술관, 세 컨더리 마켓과 아트 페어를 두루 경험한 그녀는 결국 작가와 직접 호흡하 는 순간에 가장 큰 의미를 두었고, 이를 토대로 ‘티나 킴 갤러리만의 프로그 램’을 구축해왔다. 국제갤러리의 연장선으로만 보이던 초창기를 지나, 꾸 준히 국제 아트 페어에서 존재감을 쌓으며 자신만의 좌표를 확립한 것. 그 여정의 연장선에서 그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묻혀 있던 질문에 귀 기울 였다. ‘남성 중심으로 기록된 단색화 세대에서 주목해야 할 여성 작가는 누 구인가’라는 물음이 그것이었다. 최욱경과 이신자,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동 시대 여성 작가들의 작업은 그렇게 다시 세계 무대의 대화 속으로 호출되 었다. 첼시 공간 오픈 10주년을 맞아, 티나 킴과 동행해온 여성 작가들의 여정을 티나 킴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본다.

 

뉴욕 첼시 공간 개관 1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티나 킴 갤 러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볼 때, 가장 중요한 성취와 전환점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가장 큰 성취는 티나 킴 갤러리만의 정체성을 확립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미술계의 여러 분야를 경험하면서도, 결국 제게 가장 중요한 건 똑같았거든요. 작가를 알리고, 국제적인 큐레이터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작품이 주요 전시와 컬렉션에 자리 잡도록 돕는 일. 그 목표를 위해 전시뿐 만 아니라 비엔날레, 출판 같은 다양한 방식을 시도해왔습니다. 처음에는 단색화 작가들을 뉴욕에 소개하면서 갤러리가 알려졌고, 이어 동시대 작 가들과 긴밀히 협업하며 기반을 단단히 다졌습니다. 특히 개관전 를 클라라 킴에게 의뢰한 것도, 오늘날 사회적 변화와 글로벌 이슈에 예민하게 응답하는 작가들을 함께 조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이 후 전 세계 주요 아트 페어에 참가하며 한국 작가들의 시장을 확장했고, 프 리즈 서울 선정위원회 활동이나 미국화랑협회(ADAA) 이사로 참여한 것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단색화를 세계 무대에 알리는 과정에서, 갤러리의 시야는 어떻게 확장되 었나요? 단색화를 국제 무대에 소개하는 일은 큰 행운이었지만, 동시에 늘 따라온 질문이 있었어요. ‘그 세대에 여성 작가는 왜 보이지 않는가?’ 한 국과 미국을 오가며 큐레이터, 연구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반복된 질 문이었죠. 억지로 답을 만들기보다, 한국 미술을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에 서 자연스럽게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발굴하는 흐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최욱경 작가의 전시는 그런 사례였어요. 미국에서의 활동 시기를 중심으 로, 동시대 미국 작가들과 같은 맥락에서 조명하고 싶었습니다. 유족과 신 뢰를 쌓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휘트니와 구겐하임의 소장으로 이어졌을 때 큰 보람을 느꼈죠. 또 하나의 중요한 순간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이 신자 작가의 회고전이었습니다. 전시 스케일과 아카이브의 밀도, 한 시대 를 통과하며 이어온 실험과 삶의 기록이 압도적이었어요. 가정과 교육, 작 품 활동을 모두 감당해내며 새로운 길을 열어간 한 여성 예술가의 도전 자 체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깨달음이 있었나요? 여성 작가를 이해하려면 순수미 술의 경계를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신자 작가는 한 국전쟁, 육아, 교육 활동 속에서도 작업을 이어갔고, 자수를 매체로 선택해 삶과 예술을 연결했습니다. 여성의 노동과 기술을 ‘부차적’으로 보지 않고 동등한 미학으로 존중하는 시선, 그것이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관점이 라고 생각합니다. 

 

여성 갤러리스트로서의 시선이 특별히 더해지는 지점이 있었을까요? 저는 솔직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유리천장을 크게 느낀 적은 없어요. 폴라 쿠퍼, 메리언 굿맨, 그리고 제 어머니까지 분명한 계보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 다. 중요한 건 신중한 작가 선택, 좋은 전시, 그리고 시장에서의 신뢰죠. 다만, 여성 작가들을 지원하는 일에는 늘 연구와 출판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기록을 남기고, 국제 담론에 올리고, 그 과정을 통해 관객 과 연결될 수 있게 하는 것. 그래서 저는 출판물 개발이나 미술관 카탈로그 제작을 적극적으로 돕고, 적절한 필자를 찾는 데도 힘을 쏟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가장 주목받는 동시대 작가들과는 어떻게 협업을 이어가고 계신가요? 동시대 작가와의 협업은 언제나 새로운 배움의 과정입니다. 국 제 무대에서 그들의 작업이 제대로 전달되려면 단순히 전시 기회를 마련하 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작품이 가진 언어를 어떻게 세계 관객과 연결할 수 있을지, 그 지점을 끝없이 고민해야 하죠.

 

구체적인 사례를 들자면요? 좋은 예로 강서경 작가를 들 수 있을 것 같아 요. 2016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그의 작업을 처음 봤을 때, 조각과 퍼포먼 스, 영상이 하나의 악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움직이는 모습이 무척 인상 적이었어요. 무엇보다 그녀는 한국 젊은 세대가 마주한 현실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전통적 유교 문화와 급격한 현대화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어려움, 사회적 경계와 제약 같은 주제들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죠. 전통과 현재를 단순한 표식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보편적인 감 각으로 재해석한다는 점, 그 고유성이 제가 강서경 작가를 국제 무대에 자 신 있게 소개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2018년 ICA 필라델피아 개인전을 계기로 본격적인 협업이 시작됐고, 비교적 빠르게 주요 기관과 컬렉터에 게 작품을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작업의 성격과 규모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미술관을 중심으로 전시를 선보였고, 이후 베니스, 리버풀, 상하이 같은 국제 비엔날레 무대로 차근차근 확장해갔습니다.

 

이미래 작가의 개인전 역시 또 하나의 중요한 사례였다고요. 비슷한 맥락 에서 이미래 작가의 테이트 모던 개인전은 또 하나의 중요한 경험이었습니 다. 한국 작가가 유럽의 대표적인 기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건 흔치 않은 일이었고, 그만큼 한국 동시대 작가들의 가능성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런 전시가 단발적인 이벤 트로 끝나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기관과의 신뢰를 쌓고 장기적인 협력으 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일. 그것이 갤러리의 가장 중요한 역할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작 가가 자기만의 언어를 지켜내면서도 세계의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갤러리는 단순한 연결자가 아니라, 그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한국 작가를 넘어 아시아계 작가들까지 확장되었습니다. 파시타 아바드와 의 협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파시타 아바드와는 2023년 워커 아트 센터 회고전을 계기로 함께 일하게 되었어요. 마침 갤러리 프로그램의 확 장 방향을 고민하던 시점이었는데, 그녀의 작품을 접하며 큰 울림을 받았 습니다. 그녀의 주제는 전쟁과 난민, 이민과 이주 등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 는 정치적 현실과도 맞닿아 있었거든요. 무엇보다도 미국 내 아시아 이민 자들의 경험을 피해자의 시선이 아니라 주체적인 목소리로 풀어냈다는 점 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아바드와의 협업은 갤러리 프로그램에 어떤 새로운 시각을 더해주었나요? 아바드는 평생 세계 각지를 직접 방문하며 현지의 사회, 정치적 이슈를 작 품으로 담아냈고,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알리는 데 헌신했습니다. 작가를미술관에 소개하고 컬렉션에 포함시키는 과정을 통해 저 역시, 기존보다 훨씬 다양한 기관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한 명의 작가를 알 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네트워크를 열어가는 계기가 된 거죠. 이런 경험 을 통해 국제적 네트워크야말로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확장해야 할 영역임 을 실감했습니다.

 

티나 킴 갤러리가 만들어가고 싶은 국제적 가교 역할은 무엇인가요? 지금 은 아바드의 유럽 순회전을 준비하며 여러 기관과 파트너십을 연결하고 있 습니다. 한국 주요 미술관에서 시작된 전시가 해외로 이어질 수 있도록, 경 로를 열어가는 것이 목표예요. 단순히 작품을 소장 기관에 소개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전시 교류와 협력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제가 가장 집중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아시아, 북 미, 유럽을 잇는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확장해나가고자 합니다.

 

서울이 국제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와 잠재력을 어떻게 평가하 시나요? 제가 프리즈 서울 선정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하며 모든 부스를 둘러본 결과, 불과 몇 해 사이에 젊은 한국 갤러리들의 프리젠테이션 역량 이 눈에 띄게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주요 갤러리 외 에는 다른 곳을 잘 몰라서 선정위원회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제는 신진 갤러리와 함께 더 넓은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 같아요. 프 리즈 서울은 아시아 전반의 갤러리 지형을 한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는 드문 장입니다. 동남아, 동아시아 컬렉터에게는 ‘접근성’이, 북미와 서유럽 컬렉터에게는 ‘다른 감각’을 만날 수 있는 동기가 되죠. 동시에 서울은 페 어가 아닌 ‘도시’ 자체가 이유가 되는 곳입니다. 주요 미술관들의 기획력, 큐레이터십의 정교함, 도시 전반의 문화 인프라 등의 조합은 세계 어느 도 시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페어를 보러 오지만, 결국 ‘서 울’이라는 도시의 인프라나 프로그램 때문에 머물게 되거든요.

 

올해로 뉴욕 생활 30년을 맞으셨습니다. 앞으로의 10년은 어떤 비전을 그 리고 계신가요? 뉴욕에 처음 왔을 때는 미술관, 비엔날레, 작가 스튜디오 를 빠짐없이 다니며 가능한한 모든 경험을 흡수하려 했습니다. 원래는 몇 년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뉴욕의 에너지와 가능성 속에 서 도전을 이어가며 이곳에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자리 를 쌓아 지금의 갤러리를 만들 수 있었죠. 지금까지 쌓아온 기반 위에서 더 넓고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국제적인 화랑으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입 니다. 단색화와 한국 작가를 세계에 알리는 데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한국 화랑’이라는 정체성을 넘어 아시아와 전 세계의 작가들과 함께 새로운 문 화예술적 교류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세계 여러 기관과의 협력을 적극적으 로 이어가며,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화랑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그 것이 제가 펼쳐가고자 하는 다음 10년의 비전입니다. 

October 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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